신도神道[제2장]불교와의 관계와 신도설의 발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미(神)마츠리는 다양화되는데 그 배경에 불교의 존재가 있다. 불교의 영향은 크며, 신을 부처나 보살과 같이 관념화시키고, 이세신도나 요시다신도 등 중세를 대표하는 신도사상의 형성에도 큰 역할을 했다. 
에도시대가 되면 가미(神)신앙의 형태는 한층 더 다채로워졌다. 에도시중에서 행해진 마츠리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흥을 돋우고, 오시(御師)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먼 지역의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부응했다. 

-요시다신도의 전개-

15세기에 요시다신도(吉田神道:유이츠신도唯一神道)를 대성한 요시다 카네토모(吉田兼倶,우라베씨卜部氏)의 선조는 대대로 거북점(亀卜)의 기술을 구사하여 진기관(神祇官)으로 봉사함과 동시에,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뛰어난 해석을 해왔다. 이와 같이 진기제사에 관한 지식의 축척이 카네토모가 겐본소겐신도(元本宗源神道)를 신도의 정통으로 자리매기는 설을 형성한 원동력이였다. 
카네토모는 신도계의 동량(棟梁)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고, “진기관령장상(神祇管領長上)”을 자칭하여 신관지배를 진행시키고, 요시다가 대대의 당주는 소겐 센지(宗源宣旨), 신도재허장을 발행했다. 이것으로 근세의 요시다가의 신관통괄체제와 그 근간이 되는 제식의 기초가 완성되었다.

-불교와의 관계와 신도설의 발전-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교신자는 일본 신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신사에 진구사(神宮寺)가 건설되고 신 앞에서 독경을 외웠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불상의 영향을 받은 여러 신상(神像)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불교적 사상에 기반을 둔 진기(神祇:하늘과 땅의 신)해석도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중근세가 되면, 서민들도 신과 부처를 구분하지 않고 경외했다. 그 전형이 기청문(起請文)이다. 구마노산산(熊野三山,와카야마산)의 고오호인(牛玉宝印)을 사용한 이 서약서는 신과 불교세계의 제천(諸天) 등에 대한 것이였다. 또 이 시대에 신들의 영지에 많은 불교자가 개재하고 있었던 것이 당시의 산케이만다라(参詣曼荼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앙의 다채로운 형태-

근세가 되면, 에도시중의 신사제례의 활발함이 눈에 띈다. 그 중에서도 간다신사(神田神社, 도쿄도)의 간다마츠리는 막부의 공적인 제례였는데, 미코시(神輿) 외, 다시(山車)나 쓰케마츠리(附祭)의 수레도 많이 나오고, 그 성황된 모습은 막부가 그 화려함을 경계하는 금지령이 나올 정도였다. 수레에는 서민 신앙이 짙게 반영되어 지진을 불러일으키는 메기도 그려졌다. 
또 한 일정범위의 “단나(檀那)”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기도나 부적을 배포하는  “오시(御師)”라 불리는 사람들의 활동도 성행했다. 이러한 오시의 활동은 사람들의 바램에 뛰어난 공덕을 발휘하는 신에 대한 신앙을 깊게 했다. 특정한 공덕을 가진 신에 대한 신앙은 일상에서 볼 수 있으며, 천신인형(天神人形)은 그러한 신앙의 표현으로서 최근까지 각지에서 양산되었다. 

-천신인형 (天神人形) (미야지 나오카즈宮地直一가 소장)-

미야지 나오카즈(宮地直一)는 내무성 신사국에서 메이지말기부터 쇼와초기에 걸쳐 신사행정을 담당하고, 나중에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한 신도사 연구자. 국학원대학에서도 관료시대부터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연구는 사료의 폭넓은 소재 파악과 적합한 분석으로 지금도 여전히 일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 
미야지는 고치현(高知県)의 덴만궁(天満宮)의 신관에 종사하는 집안의 관계자였고, 자신도 천신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미야지 자택의 일실에 있는 벽장 한 면에는 천신인형이 모셔져 있다. 인형은 200개가 넘고, 그 산지는 전국으로 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