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考古[제6장] 「일본」의 발자취 -역사시대-

6세기 중반 불교전래와 전후하여,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의 축조가 종식의 길로 향했다. 제사행위에 따라 사회를 유지하는 시대가 끝을 알렸고, 663년(덴지칭제2 天智稱制)  백촌강(白村江)에서 당・신라 연합군과 싸워서 패한 것도 조력하여 급속하게 율령국가 형성으로 향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거기서 법과 문서에 의한 통치가 시도되고, 덴무(天武)・지토조(持統朝)에 「천황」의 군주호나, 「일본」의 국호가 정해졌다. 또 본격적으로 도성・지방관아와 사원이 성행하게 되면서 진호(鎮護)국가의 사상에 입각하여 고쿠분사(国分寺)・고쿠분니사(国分尼寺)도 건립되었다. 그 후, 율령제의 변질로 인해 헤이안시대 후기부터 생산이나 유통이 각지의 국아령(国衙領)・장원단위로 정비되어갔다. 무가문화가 전개된 가마쿠라시대부터 무로마치시대는 진정한 지방분권 상태가 되었다. 아즈치모모야마시대・에도시대를 거쳐 메이지유신을 맞이하면서 산업의 근대화나 교육제도의 정비도 시도되었다. 그리고 쇼와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민주적인 평화국가를 확립하고, 경제적인 번영을 실현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고대의 토기・도기(陶器)-

7세기후엽부터 8세기에 걸쳐, 많은 관인이 활동한 궁도(宮都)나 관아 주변에서는 율령적토기양식이라 불리는 규격적인 토기가 사용되었다. 당삼채(唐三彩)의 영향을 받은 나라삼채(奈良三彩)는 금속기 등의 형태를 옮긴 것이고, 주로 관아나 사원・제사유적에서 출토되었다. 헤이안시대가 되면 다자이후(大宰府)의 고로관(鴻臚館)을 통해서 수입된 월주(越州)가마의 청자 등 중국산 도자기가 최고급품 취급을 받았다. 또 수입도기를 모방하여 광택을 낸 녹유(緑釉)도기・회유(灰釉)도기가 생산되었다.

-중세의 토기・ 도기(陶器)-

회유(灰釉)도기를 굽던 아이치현(愛知県) 사나게(猿投)가마에서는 11세기후반부터 광택을 내지않는 야마챠왕(山茶碗)을 대량 생산했다. 12세기에는 도코나메(常滑)가마와 아츠미(渥美)가마에서 항아리・독・바리 등의 생산이 시작되었고, 나중에 도코나메야키로 많은 지방에 가마가 파생되었다. 한편 이시카와현(石川県) 스즈(珠洲)가마와 같이 16세기까지 조업을 계속한 스에키계(須恵器系)의 가마도 있다. 아이치현 세도(瀬戸)가마에서는 12세기말까지 수입도기를 모방한 고급도기를 제작했고, 13세기말에 철유(鉄釉)를 개발, 15세기말에는 대량 생산이 가능한 큰 가마를 채용했다.

-자기(磁器)-

최초의 국산도기인 이마리야키(伊万里焼)는 조선에서 데려온 도공들이 1610년대에 사가현(佐賀県) 아리타(有田)에서 개창되었다. 초원기의 자기를 초기 이마리라고 부르지만, 1640년대가 되면 색회(色絵)기술도 도입되어 이른바 고쿠타니(古九谷)양식이 생겨났다. 또 명나라말 청나라초에 중국도기의 입수가 곤란하게 된 네덜란드와 동인도 회사의 주문을 계기로 하여 가키에몬(柿右衛門)양식이나 긴란데(金襴手)가 유행했다. 또 사가번 가마의 나베시마야키(鍋島焼)는 장군가 등에 헌상하기 위한 최고급품이였다.

-율령국가와 도성・지방관아의 전개-

후지와라경(藤原京)에서 시작되는 조방제(条坊制)에 기반을 둔 도성에서는 궁전건축에 복변연화문헌환와(複弁蓮華文軒丸瓦)나 당초문헌평와(唐草文軒平瓦) 등의 기와를 채용했다. 그리고 경의 중심에 궁을 둔 후지와라경과 달리, 당의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헤이죠경(平城京)이나 나가오카경(長岡京)・헤이안경(平安京)에서는 북단에 궁이 설치되었다. 이들 도성이나 외교의 창구에 해당되는 다자이후(大宰府), 동북 경영의 전선에 놓인 다가성(多賀城)을 비롯하여 제국(諸国)의 국후(国府)・군가(郡家) 등에서는 벼루・목간(木簡)・흑서토기 등이 출토되고, 문서행정의 침투를 엿볼 수 있다.

-일본의 독특한 산악신앙-

산악수행자를 개조로 하는 슈겐도(修験道)는 진기(神祇)신앙이나 산림불교 등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일본 특유의 산악종교이다. 고래, 수원이나 랜드마크로서의 산에 대한 신앙은 산기슭제사에서 멈추고 있었는데, 8세기경부터 산정상에서의 제사가 인정되게 되고, 산림불도들에 의한 나라현(奈良県) 긴푸센(金峯山)・도치기현(栃木県) 닛코난타이산(日光男体山)・도야마현(富山県) 다테야마(立山) 등의 산악등배도 활발화되었다. 10세기가 되면 산봉우리들을 순례하는 산악연행(山岳練行)이 각지의 영산(霊山)에서 시작되고, 11세기경에 슈겐도의 독자성이 확립되었다.

-말법(末法)과 경총(経塚)의 조영-

일본에서 말법의 세상을 맞이했다고 여기는 1052년(에이쇼7 永承7)을 전후로 하고, 석가입멸부터 56억7천만년 후에 아미여래가 하생할 때까지 불법을 전하기 위해 경전을 매납한 경총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법화경』등을 수납하는 경통은 금동제・청동제 외 철제・도제・석제의 예도 알려져 있다. 12세기이후는 점차 쇠퇴되어 가지만, 중세이후도 현세이익이나 죽은 이의 명복을 기원하는 추선공양(追善供養)을 목적으로 조영되고, 근세가 되면 경석(経石)을 매납한 역석(礫石)경총이 유행했다.

-중세묘와 장골기(蔵骨器)-

중세에는 토광묘(土壙墓)・집석묘(集石墓)・총묘(塚墓)나 이것에 석탑이 있는 사례 등, 다양한 묘가 조영되었다. 본 대학 고고학연구실이 실습조사를 실시한 도쿄도(東京都) 미야케섬(三宅島)의 모렌도(物見処)유적에서도 경석이 있는 총묘상(塚墓状)의 유구가 여러개 확인되었다. 또 13세기 이후가 되면 승려나 무가에 화장이 보급되고, 도자기나 동제・석제・목제의 장골기를 묻은 묘가 널리 보이게 되었다. 특히 무가의 묘에서는 박재자기(舶載磁器)나 고세토(古瀬戸)의 매병(梅瓶)・사이호(四耳壺)를 이용한 장골기가 다용되고 있다.

-화경(和鏡)-

한대(漢代)에서 당대(唐代)까지의 거울을 모방한 방제경에 대해서 초화조첩(草花鳥蝶) 등의 풍물을 의장화하고, 경배문양에 채용된 것을 화경이라고 부른다. 그 출현기는 국풍문화의 융성기에 해당하는 11세기 후반경이라 여겨지고 있고, 거울 본래의 용도인 화장도구로의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신불에 대한 봉납, 경총에 매납, 그리고 부장품으로 사자에게 부장되었다. 무로마치시대 말경에는 자루가 달린 거울이 출현하고, 유리거울이 보급되는 메이지시대까지 화경이 주류를 이루었다.

-판비(板碑)-

판비는 가마쿠라시대에서 무로마치시대에 걸쳐 성행한 공양탑의 일종이고, 판자모양 석재의 머리부분을 삼각형으로 가공하고 불보살의 종자, 또는 명호・제목 등 그 외에, 기년명, 게송(偈頌) 등이 새겨졌다. 장엄구(荘厳具)인 불번(仏幡)을 원형으로한 것으로 여겨지고, 목제도 존재했지만, 관동이나 시코쿠(四国)에 집중되는 녹니편암제(緑泥片岩製)의 자료가 잘 알려져 있다. 추선(追善, 죽은 이의 명복을 기원하는 불교행사)・역수(逆修,생전에 사후 명복을 비는 불교행사 )를 주된 목적으로 한 공양탑이지만, 드물게 장골기를 매납한 것도 보인다. 또 월대(月待)판비나 경신대(庚申待)판비 등도 만들어졌다.

-근세・근현대의 고고학-

근세고고학은 다이묘(大名)의 묘지나 요업사(窯業史)의 연구로부터 발달되고, 에도를 비롯한 도시의 조사가 진행된 결과, 무가지(武家地)・사사지(寺社地)・쵸닌지(町人地) 등 토지이용이나, 대규모의 상품유통 실태 등을 밝힐 수 있는 분야가 되었다. 또 막부말 이후의 산업・교통・토목 등에 관한 근대화 유산 등, 옛날에는 미개척이던 분야까지 연구가 되고 있다. 그리고 오키나와전쟁에 대한 고고학적 관심을 출발점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전쟁유적 고고학 연구도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일본의 문화전승과 민속학-

고고학과 동일하게 비문자 자료를 주된 대상자료로 하는 분야로, 일본의 문화전승을 연구하는 민속학이 있다. 1940년(쇼와15)에 일본 최초의 민속학 강좌가 열린 고쿠가쿠인대학에서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國男)교수나 오리구치 시노부(折口信夫)교수가 교편을 잡아온 이 학문은 의식주・생업・신앙・연중행사 등에 관한 유형・무형 민속사상(民俗事象)・자료로부터 사료에 기록되지 않았던 역사를 해명하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거울로 삼는 역사학적 방법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