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考古[제5장] 왕권과 「신도」의 형성 -고분시대-

2세기 후반부터 내분이 끊이지 않았던 왜(倭)에서는 「귀도(鬼道)」에 뛰어난 히미코(卑弥呼)를 여왕으로 공립하고, 소국의 연합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3세기 후반에는 동서일본에 위치하는 나라(奈良)분지로 최초의 대형전방후원분(大型前方後円墳)인 하시하카고분(箸墓古墳)이 축조되었다. 이후 6세기 후반까지 약 300년간, 기나이(畿内)의 대왕릉급전방후원분(大王陵級前方後円墳)을 정점으로 공통된 장제(葬祭)에 따라 사회를 통합하는 체제가 혼슈(本州)・규슈(九州)・시코쿠(四国)로 전개되었다. 고분제사와 병행하여 「신도」의 원형도 형성되었다. 국가형성기인 고분시대는 전기・중기・후기・종말기로 구분된다. 전기에는 고분의 정형화가 진전되고, 수혈계매장(竪穴系埋葬) 시설에 중국경(中国鏡)이나 남도산패륜(南島産貝輪)을 모방한 석제완식류(石製腕飾類) 등이 부장되었다. 중기에는 조선반도에서 새로운 기술이 전해져서 철제무기・무구의 부장이 현저해졌다. 그리고 후기이후에는 횡혈식(横穴式) 석실이 보급되고, 소규모의 고분으로 이루어진 군집분(群集墳)이 성행하게 되고, 종말기에는 대왕분(大王墓 )만이 특수한 구조의 고분을 조영하게 되었다.

-하지기(土師器)와 스에키(須恵器)-

하지기는 야요이토기와 같이 산화염소성된 실용적인 도자기이다. 단 고분시대 전기에는 제사용으로 보이는 소형정제토기도 이용되었다. 한편, 조선반도의 도질(陶質)토기에서 유래되어 4세기말에 등장하는 스에키는 굴가마(窖窯)에서 환원염소성된 제품이고, 대부분이 고분이나 제사유적의 제례에서 사용되었다. 주요한 생산지의 하나인 오사카후 스에무라가마(陶邑窯)에서는 10세기까지 조업이 계속되었고, 출토된 스에키의 분석을 통하여 스에키편년사의 틀이 만들어졌다.

-하니와(埴輪)-

고분에 수립된 하니와의 기원은 기비(吉備, 현재 오카야마현岡山県 등)지방에 있고, 분구묘에 바쳐진 기대(器台)와 음식물의 상징인 항아리세트가 원통하니와와 조안형(朝顔形)하니와의 원조형이 되었다. 형상하니와는 가장 빨리 4세기 전반에 닭모양이 나타나고, 집・방패・뚜껑・화살통 등의 기재를 모방한 것이 이어진다. 5세기 후반에는 인물하니와나 동물하니와가 출현했다. 또 5세기 전반에 굴가마의 생산기술이 도입되자, 산지 한곳에서 여러 고분으로 하니와를 공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박재경(舶載鏡)과 방제경(仿製鏡)-

야요이시대의 박재경에는 연호문경(連孤文鏡 내행화문경内行花文鏡)・성운문경(星雲文鏡) 등의 전한경(前漢鏡)이나, 방격규구경(方格規矩鏡) 등의 후한경(後漢鏡)이 있고, 주로 북부 규슈의 왕묘에 부장되었다. 고분시대로 들어가면 기나이(畿内)를 중심으로 하는 고분에 화문대신수경(画文帯神獣鏡)・삼각연신수경(三角縁神獣鏡) 등이 부장되었다. 중국 거울을 모방한 방재경은 지름 20㎝이상의 대형품이 있고, 직호문(直孤文)이나 가옥문(家屋文) 등의 문양을 한 것이나, 테두리에 방울을 단 영경(鈴鏡)과 같이 일본열도의 독특한 의장(意匠)이나 형태도 채용되었다.

-장신구・제구로서의 구슬-

고분시대의 구슬 생산은 야요이시대 이래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고, 비취(翡翠)・벽옥(碧玉)・수정 등의 소재를 이용한 구옥(勾玉)・관옥(管玉)・소옥(小玉)이나, 유리구슬 등의 장신구가 만들어졌다. 한편, 전기후반이 되면 남도산(南島産) 조개로 만든 팔찌를 모방한 석제완식류(철형석鍬形石・차린석車輪石・석천石釧)도 생산되고, 그 대부분이 기나이(畿内)를 중심으로 하는 유력고분에 부장되었다. 중기이후에는 거울・검・구슬 등의 재료를 모방한 석제모조품이 보급되어서 고분이나 제사유적의 의례에서 사용되었다.

-고분시대의 무기・무구(武具)・마구(馬具)-

고분시대의 무기・무구・마구에는 중국대륙이나 조선반도에서 전해진 박재품(舶載品)과 고도의 기술을 깃들인 국산품이 존재한다. 중기에는 일본열도의 독특한 대금식갑주(帯金式甲冑)가 생산되고, 실용품뿐만 아니라 장식용의 화려한 마구도 등장했다. 후기가 되면 소찰(小札)을 엮어 이은 가동성 풍부한 괘갑(挂甲)이 일반화되었다. 오랫동안 왜계대도(倭系大刀)와 반도계대도(半島系大刀)가 함께 존재했지만, 아스카시대를 맞이할 무렵에 세로패(縦佩)에서 가로패(横佩)로 변화되고, 나라시대에 들어서면 당양대도(唐様大刀)가 대신되었다.

-군집분(群集墳)의 발달-

6세기후반에는 탁월한 수장분(首長墳)으로서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쇠퇴하는 중에 횡혈식석실(横穴式石室)을 가지는 소원분(小円墳)이나 암벽면에 옆구멍을 판 횡혈묘(横穴墓)가 군집하는 예가 널리 보인다. 이와 같은 현상은 유력가장층에 대한 야마토정권의 직접적 지배가 있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본 대학 고고학연구실의 고고학실습에서도 나가노현(長野県) 호타카(穂高)고분군을 대상으로 고분시대의 종말과 고대의 시작에 관한 조사연구를 실시하고 있다.

-아스카시대의 고분-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의 조영이 멈춘 7세기대는 고분시대 종말기라고 불리고, 역사학적 시대구분으로 말하면 아스카시대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각지에서 고분의 조영이 이어지는 속에서, 대왕・천황릉으로 보이는 대형방분(大型方墳)・원형이나 팔각형분 외, 특수한 방분(方墳)・상원하방분(上円下方墳) 등이 축조되었다. 매장시설은 횡혈식석실 외 횡구식석(横口式石槨)이 기나이(畿内)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또 협저관(夾紵棺)을 비롯한 옻칠한 관은 황족 등과 같은 귀인만에게만 허락된 특수한 관이였다.

-사원의 출현과 기와의 생산-

스슌(崇峻)천황 원년(588)에 기공된 아스카사(飛鳥寺)는 일본 최고의 기와지붕건축이고, 조선반도에서 전래된 헌환와(軒丸瓦)가 처마 끝을 장식했다. 헌환와에는 백제식과 고구려식의 소변연화문(素弁蓮華文)이 있고, 7세기후반부터는 복변연화문(複弁蓮華文)이 성행했다. 한편, 헌행와(軒平瓦)는 7세기 초두에 호류사(法隆寺)의 약초가람(若草伽藍)이나 사카다사(坂田寺)에 뒤덮인 손으로 새긴 당초문와(唐草文瓦)가 오래되었고, 7세기후반에 중호문와(重孤文瓦)도 나타났다. 그러나 아스카의 여러 궁의 궁전건축에서는 연이어 전통적인 풀지붕 또는 판자지붕 건축이 이용되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신도」의 원형-

고분시대가 되면 그때까지 열도각지에서 할거하고 있던 여러 집단이 야마토 왕권・대왕 아래에서 통합되고 「국가」의 원형이 출현했다. 이와 같이 열도내의 광역한 사회통합과 표리일체의 현상으로서 일본의 고유종교 「신도」의 원형도 명확해져 갔다. 고분에 매장된 거울・철제품・장신구 등과 제사유적에 봉헌된 헤이하쿠류(幣帛類) 품목이 대체로 공통되고 있는 사실은 조령제사와 진기(神祇)신앙이 겸행하여 정비된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