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考古[제4장]동아시아세계의 동단 -야요이시대-

약 2,500년전에 조선반도에서 벼농사농경 기술이 도입되었다. 동시에 그때까지 끓이는 것에 이용된 심발을 주로 한 토기도 새로운 생활양식에 맞춘 항아리・단지・고배 등으로 구성이 변화했다. 야요이시대는 북부규슈에서 인정하는 조기를 제외하면 전기・중기・후기로 구분되지만, 전기동안에 온가가와식(遠賀川式)・온가가와계 토기와 함께 벼농사기술이 동북지방까지 파급되었다. 또 전기말에 조선반도를 거쳐 청동기・철기가 전해져서, 중기의 북부규슈에 한경(漢鏡)이나 무기형 청동기 등을 부장한 왕의 묘가 나타났다. 한편, 북부규슈 이외 서일본에서는 청동기의 부장이 인정되지 않았다. 또 중부지방보다 동쪽에는 청동제 제기 자체가 전파되지 않았고, 일본열도 안에서도 사회적 계층분화 발전은 일정하지 않았다. 후기가 되면, 서일본 각지부터 동해지방에 성립된 작은 지방에서는 각각 지역적 특징을 가진 분구묘(墳丘墓)가 생겼다.

-야요이토기-

북부 규슈에서는 죠몬시대 만기의 돌대문(突帯文)토기로 여겨져 오던 유우스식(夜臼式)토기 단계에 벼농사가 도입되어, 조선반도를 근원으로 볼 수 있는 단도마연(丹塗磨研)의 호형(壺形)토기도 보이게 되었다. 또 전기의 이다즈케식(板付式)토기를 비롯한 온가강식(遠賀川式)토기는 벼농사와 함께 서일본 일대로 전개되고, 점재적으로 동부지방까지 온가강계 토기가 파급되었다. 중기가 되면, 각지에서 독특한 토기가 사용되었다. 한편, 동일본에서는 야요이시대후기까지 죠몬에서 만들어진 토기가 계속 사용되었다.

-벼농사와 석기・철기-

벼농사(水稲耕作)가 보급된 발자취는 수전유구(水田遺構)와 같은 직접적 증거뿐만 아니라 벼농사에 적합한 도구의 존재에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벼의 이삭부분을 베는데 사용된 석칼이나 목재의 벌채・가공도구인 태형합인석부(太形蛤刃石斧) 등, 조선반도에서 유래된 대륙계 마제석기가 벼농사와 함께 서일본 일대로 보급되었다. 또 전기말에 철기의 전래가 인정되지만, 선진지역인 북부 규슈에서도 농기구의 철기화가 진행된 것은 중기후반 이후의 일이다.

-청동기 제사의 지역성-

조선반도에서 전래된 청동기에는 동검(銅剣) ・동모(銅矛)・동과(銅戈) 외,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이나 소동탁(小銅鐸) 등이 있었다. 중기전반 이후, 열도내에서 생산이 시작되자 무기형 청동기나 동탁은 점차로 대형화되어 본래의 기능을 잃어가게 되었다. 또한 북부 규슈 주변의 수장묘에서는 무기 등을 부장하는 한편, 타지역의 청동기는 재지집단의 공유재로서 취급되었다. 텐류강(天竜川)・지쿠마강(千曲川) 유역의 동쪽에서는 청동기 매장예도 보이지 않고, 죠소(常総, 이바라키현・지바현 茨城県・千葉県)지역을 중심으로 유각(有角)석기가 분포한다. 

-야요이시대의 묘제(墓制)-

북부 규슈에서는 야요이시대 전기부터 옹관묘(甕棺墓)가 발달하고 중기이후가 되면 대규모의 분구묘(墳丘墓)가 조영되었다. 특히 대형의 한경(漢鏡)이나 다수의 청동기를 부장한 사례는 이토국(伊都國)・나국(奴國)의 왕묘라 여겨지고 있다. 또 긴키지방에서 출현된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는 중기에 동일본으로 파급되었다. 한편, 동일본에서는 유골을 토기관에 재매장하는 풍습도 보인다. 후기에는 각지에서 독특한 묘가 만들어지고 돌출부를 갖고있는 대형분구묘가 산인(山陰)・산요(山陽)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